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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개연성의 의미와 기준

 

모든 서사물(이야기)은 시작할 때는 많은 개연성에 놓이게 된다.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그 개연성이 점점 필연성이 되어 마지막에는 그 필연성(유일하게 가능한 결말)으로 끝맺어야 훌륭한 이야기가 된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장편소설은 분량 면에서 다른 서사물에 비해 여유가 있기 때문에 우연성도 끼어들어 이야기의 핍진성(문학 작품에서, 텍스트가 믿을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을 떨어뜨린다. 그러니 소설에 우연성이 많다고 탓하지 말라, 원래 소설(장편소설)이 그렇다.

김병욱, '우연성, 개연성, 필연성', 시민의소리, 수정 인용



나는 이 글을 통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개연성과 필연성은 다르며, 현실성과도 별개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야기에서 개연성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개연성은 상당히 폭넓은 개념인 동시에 문화 의존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유를 하나씩 들자면, 먼저 이야기에는 현실적인 것도 있고, 비현실적이지만 사실적인 것도 있으며, 둘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지만 개연성이 뛰어난 것도 있다. 그리고 개연성은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조건인데, 여기서 '그럴듯하다'의 기준은 개인적인 견해(뇌피셜)가 아니라 여론이다. 이때 독자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인 관습과 전통은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치며, 작품의 개연성에 대한 개개인의 판단은 여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목차 (3번부터 읽거나, 골라 읽어도 무방하다)

1. 개연성과 필연성, 현실성의 차이

1) 개연성과 필연성의 차이는 뭘까?

2) 개연성과 현실성은 어떻게 다를까?

2. 개연성의 기준

1) 현실은 개연성의 척도가 될 수 있나?

2) 허구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건 뭘까?

3. 개연성과 예측 가능성

1) 복선이나 떡밥은 개연성을 위해 꼭 필요할까?

2) 결말로 러브코미디의 개연성을 논할 수 있나?

1. 개연성과 필연성, 현실성의 차이

1) 개연성과 필연성의 차이는 뭘까?

개연성[蓋然性](문학)

허구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문학 작품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을 의미한다. 문학은 사실과는 다른 문학적 보편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이때 이 문학적 보편성을 보증하게 되는 사건의 연관관계를 개연성이라 한다.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필연성[Necessity, 必然性]

필연성의 종류에는 형이상학적 필연성, 인식적 필연성, 법칙적 필연성, 도덕적 혹은 법적 필연성 등이 있다.

(우리가 플롯을 논할 때의 필연성은 보통 인식적 필연성, 즉 뇌피셜이다.)

인식적 필연성이란 '아이유가 남자가 아니다'와 같은 명제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인식적 판단은 그 판단을 하는 사람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즉 명제 P가 어떤 사람 A에게 인식적으로 필연적이라는 것은, A가 가진 경험적인 증거들을 통해 사유해보았을 때 “P가 아니다”라는 판단이 충분히 거부된다는 것이다.

두산백과, 수정 인용

 

2) 개연성과 현실성은 어떻게 다를까?

현실성[現實性]

현재 실제로 존재하거나 실현될 수 있는 성질.

네이버 국어 사전

 

기본적으로 개연성은 현실성과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나 뉴스, 다큐에서도 개연성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다. 개연성은 설명하는 방법과 인과에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작품이 전제하는 설정 안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앞뒤가 맞기 때문에' 납득이 되는 묘사라면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전달할 때에도 추후에 일어날 일을 설명하기 위해 그 일이 일어날 만한 정황을 충실히 묘사하거나 인과가 성립해야 한다.

나무위키, '개연성', 수정 인용

 

2. 개연성의 기준

1) 현실은 개연성의 척도가 될 수 있나?

이야기 진행 장치를 우연과 필연, 개연으로 구분할 때 우연의 비중이 높다고 해서 전개가 부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필연, 개연보다는 오히려 우연한 이벤트의 중첩, 조합으로 촉발되는 일이 많다. 우연성이 높은 사건을 다룰 때에는 우연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편이 자연스럽다.

문제는 많은 작가들이 우연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어설프게 우연을 개연, 필연으로 포장하려 드는 것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작가가 가진 그릇의 크기가 드러난다. 작가의 협소한 시야와 일천한 경험, 그리고 편협한 취향을 객관화해서 개연과 필연을 꾸며내다 보니 이야기 소비자에게 공감커녕 이해조차 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양산작들에게서 '왜'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작가의 주관적 인과 설정이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즉 작가는 나름대로 필연성, 혹은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야기를 설계하지만 독자들이 사건의 연관관계에 어리둥절해 하고 마는 것.

Decoy, 네이버 블로그, '이계생존귀환계획', 수정 인용

 

현실에서는 개연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해당 사건의 당사자, 혹은 관찰자가 품을 수 있는 생각이지, 보통 특정 사건 자체는 그 사건이 충분히 발생할 만한 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은 조금이나마 있다는 것.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친다면 하늘을 보고 있던 사람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겠지만, 이미 하늘에서는 수 시간 전부터 번개가 칠 만한 조건이 갖춰졌을 것이고, 갑자기 유성이 떨어진다면 유성을 본 사람에게 있어선 갑작스럽지만 사실 그 유성은 오래 전부터 다가오고 있었을 것이다. 즉, 등장인물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독자(관찰자)가 그것을 개연성이 떨어지는 상황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이러한 전지적 시점에서의 관찰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중략)

현실 자체는 그 형태가 얼마든지 유동적이다. 그러나 최소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는 상대방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를 충분히 생각한 뒤에 이야기의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정보들을 짜 맞춰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현실성과 개연성의 차이고, 실제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때에도 개연성을 신경써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나무위키, '개연성', 수정 인용

 

2) 허구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건 뭘까?

개연성이 문제시되는 것은 특히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이다. 제라르 쥬네트, 츠베탕 토도로프, 조너선 컬러 등의 구조주의 이론가들은 개연성의 문제를 핍진성(逼眞性, verismilitude)이나 그럴듯함(vraisemblance, plausibility)과 관계지어 논한 바 있다. 이들은 소설이란 허구의 산물이므로, 그 허구를 독자들이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신뢰감과 설득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문학적 장치들을 인과 관계에 의한 연결(필연성), 복선에 의한 암시 등으로 보았다.

한편 조너선 컬러는 허구가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요소를 다음과 같이 든다. 첫째, 너무도 자명한 현실 또는 삶 자체의 물리적 조건들, 둘째, 보편적인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문화적 관습이나 인과적 행위와 지식들, 셋째, 독자가 사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흔히 간주하는 명시적인 문학적 관습들, 넷째, 그러한 명시적인 문학적 관습에 의존하지 않고 이탈함으로써 도리어 그 작품에서 말해진 바를 더욱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 등이다.

문학비평용어사전

 

핍진성[verisimilitude, 逼眞性]

핍진성이란 용어는 라틴어 ‘verum(진실, truth)’과 ‘similis(유사한, similar)’에서 나온 말로, 박진감(迫眞感), 현실감, 유사 진실성, 진실다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개연성(蓋然性)이라는 용어와 혼용되기도 한다.

어떤 서사적 허구가 그 생산자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지더라도 그 자연스러움, 혹은 그럴듯함의 바탕이 되는 것은 엄격한 문화적인 현상이다. 넓게 보았을 때 ‘그럴듯함에 호소하는 오랜 전통’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게 볼 때 핍진성은 현실과 작품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되지만 단순히 현실과의 관계라기보다는 대다수의 사람들 혹은 대중이라는 존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 다시 말해 여론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현실이란 독자에게 이해된 현실이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상담학 사전

 

3. 개연성과 예측 가능성

1) 복선이나 떡밥은 개연성을 위해.꼭 필요할까?

독자, 시청자, 관객처럼 작품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은 작품을 보면서 추론, 공감한다. 사람들은 작품을 볼 때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이런 걸 이렇게 해볼 텐데. 어? 내 생각이 그대로 나오네. 공감된다' 혹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 거지? 놀랍고, 갑작스럽긴 해도 설명이 딱딱 들어맞잖아? 난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재밌다!!'는 생각을 곧잘 한다. 그러한 마음을 속 시원하게 잘 긁어주면 개연성이 높은 작품. (중략)

'내러티브(narrative)'의 주된 정의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도 개연성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주된 요소 중에 하나인데, 이런 개연성을 효과적으로 확립시키기 위해선 복선이 중요하다. '술 마시고 운전하다가 결국 일을 내버렸다'는 전개를 예로 들자면, '술 마시고 운전하기'라는 행동이 훗날 일을 내는 복선으로 작용하여 결국 일을 내고야 마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이 전개의 개연성은 확립이 되는 것이다.

나무위키, '개연성', 수정 인용

 

한국에서는 개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감이 있다. 소위 떡밥 회수라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떡밥을 잘 뿌려서 잘 회수하면 스토리에 대한 평이 좋아지고, 반대로 떡밥을 잘 안 뿌리거나 떡밥을 많이 뿌려놓고 회수를 못하면 평가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중략)

특히나 연재 중인 작품에서 중간중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마다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태도는 지양하는 것이 좋다. 개연성이란 것은 작품 전체를 놓고 판단할 문제기 때문이다. (중략) 작품의 완결성 내에서 설명이 제대로 된다면 작품의 개연성은 깨지지 않는다. 따라서 단순히 순차적으로 서술이 되어있지 않다 하여 개연성에 대한 시비를 남발하는 것은 옳지 못한 자세다. 개연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다면 작품이 완결될 때까지 기다리자. 그 전까지는 지나친 반전으로 몰입도가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위와 동일

 

2) 결말로 러브코미디의 개연성을 논할 수 있나?

흔히 라이트노벨에서 '히로인 쟁탈전'이 팬덤의 주목을 받는데,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메인 히로인은 1권 1장에서 정해져 있다. 자기만의 매력을 어필하는 히로인이 다수 등장해 팬덤 간의 전쟁이 벌어지곤 하지만, 사실 누가 메인 히로인이 될 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야기에서 첫 번쨰로 등장해 주인공과 이벤트를 겪는 히로인이 메인 히로인이다. 과거로부터의 오랜 인연, 독보적인 외모, 특출한 능력, 가장 주목받는 어떤 역량.. 이런 것들은 대부분 무의미하며 가장 먼저 등장해 주인공과 이벤트를 겪는 히로인이 메인 히로인이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처음 등장하는 히로인에게 관심과 애정을 퍼부을 준비가 되어있다. 마치 오리가 처음 보는 동체를 어미로 파악하듯, 이야기를 소비하는 독자들은 처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Decoy, 네이버 블로그, '사랑이라는 이름의 에고 - 잃어버린 기억'

 

언제부터 개연성이라는 말이 이렇게 자의적으로 활용되는지 탄식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우연, 필연, 개연이 의미하는 바를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개연성이란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은 흔히 '필연성'을 개연성으로 오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전개와,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전개는 전혀 다르다.

이걸 구분할 줄 안다고 해도,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내포하는 가능성이 다양하고 넓은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가치관과 해석, 바램을 기준으로 개연성을 판단하려 든다는 것이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진 않지만 내청춘 히로인 엔딩 이야기이니 이 문제에 국한해보면, 모든 캐릭터가 각자의 연애관과 사랑법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가치관으로 묶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다르다. 그런데 글을 읽는 독자의 가치관에 맞는 연애만이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형성, 특히 이성 관계는 같이 보낸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좋아하게 되었고 상대에게 호감을 표시했는가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창작물에서의 연애를 경매 입찰과 동일시하는 독자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그걸 개연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봐야 개인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중략)

그냥 감정적으로 마음에 안 들면 싫다고 하면 되는 건데, 개연성이라는 핑계를 대서 자기 가치관을 획일화시키려는 자세는 올바른 팬심이 아니라 극도로 왜곡된 팬심에 불과하다.

Decoy 님의 블로그, '내청춘 특전소설 - 개연과 필연, 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