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화

만화 '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 20권 리뷰

1년 만에 정발된 카구야 님 20권 합본세트를 구매했다.


눈부신 신념


가문, 외모, 재능, 공부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엄친아인 시죠 마키. 이 거만하고 성가신 아이를 우리가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녀 또한 짝사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평범한 소녀이며, 그럼에도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부분이 귀엽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또 슈치인 학원에서 유일하게 카구야와 맞먹는 스펙의 소유자답게, 가문의 후광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또 이시가미 유우의 첫사랑인 코야스 츠바메. 그녀는 무리에서 억울하게 소외되는 사람을 없애고 싶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상론이지만, 적어도 츠바메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만화에는 그녀처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여주인공이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이이노 미코이다.

츠바메와 이이노는 모두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목표를 추구하지만, 두 사람의 방식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츠바메는 이이노와 달리 자신의 신념을 주변과 공유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협조를 구한다는 것이다. 위 장면처럼 츠바메의 꿈에는 많은 친구들이 동참하지만 이이노의 꿈은 혼자만의 꿈으로 남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둘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념의 타당성이 아니라 그것을 남들이 납득할 수 있게끔 전달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같은 편으로 포섭하는 능력이라는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후지와라 치카의 인성

캐릭터의 변화

나무위키의 설명처럼 순수, 천연, 치유계 캐릭터였던 후지와라 치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 4차원 캐릭터, 혹은 싸가지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다. 참고할 만한 예로는 만화 <중졸 노동자부터 시작하는 고교생활>의 카타기리 마아야가 있는데, 둘의 차이는 치카의 캐릭터가 예고 없이, 180도 변했다면 마아야는 적당한 계기로 오빠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뒤로도 바보 브라콤 여동생 기질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이시가미의 미투 발언 이후로 그를 싫어하게 된 독자도 많을 텐데, 이 자리에서 이시가미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어보고자 한다. 11권 109화의 "이거 #metoo 영역이죠..."라는 이시가미의 발언은 흔히 '여자 앞에서 성 경험 이야기를 꺼내면 미투당하니 조심해라'의 의미로 회자되지만, 나는 이것이 미투 운동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친하지 않은 여성에게 성적인 화제를 언급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고 생각한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연애에는 정체기가 있다고 한다. 연인과 보내는 시간이 자신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은 <관계의 물리학>이란 책에서 익숙함을 추구하는 것은 관계의 본질이지만 새로움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은 욕망의 본질이라고 했는데, 이는 연애에도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위 장면에서 '잡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말은 사귀기 전에는 그렇게 잘하던 남자가 일단 사귀게 되면 성의가 없어지는 것을 뜻하는데, 현실은 물론이고 창작물에서도 이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만화 <중졸 노동자부터 시작하는 고교생활>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연애를 시작한지 몇 달 뒤 '연애란 게 이렇게 별 거 없는 거였나? 시시해.'라는 대사를 할 정도니 말이다.

도쿄 23구와 료고쿠 토막 상식


미나토구 : 서울 강남처럼 학군 좋기로 유명한 지역. 후지와라가 집값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만화에 나온 치요다와 미나토 외에 신주쿠나 시부야도 인기가 많으며, 메구로는 학원물 만화 <내 마음의 위험한 녀석>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도쿄 23구와 서울 25구의 비교도

출처 : https://arca.live/b/city/447401



료고쿠 : 스모의 성지인 료고쿠 국기관이 있는 지역. 료고쿠 역에서 도쿄 스카이트리까지는 지하철로 15분 거리이다.

스모 : 일본 씨름. 씨름과는 달리 경기장 밖으로 밀려나면 탈락이라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선수들의 체격이 우람하다.


국기관 : 1985년 1월 개장한 스모 전용 경기장. 프로 레슬링 경기와 콘서트도 열린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통찰


198화에서 시노미야 카구는 게임을 하고 싶은 욕구를 통제할 수 없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문제를 토로하는 이시가미 유우에게 동기 부여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극적인 상황을 겪게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그런 근성론은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 말 뒤에는 '자신의 감정을 믿지 마라.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환경이다'는 말이 붙는데, 이 둘을 합친 카구야의 조언의 의미는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가 아닐까?

즉 산출은 투입에 의해 결정되며, 만약 투입이 같다면 산출도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외모가 예뻐도 정치력이 없으면 여자들에게 밟히기 쉽다는 말은 남자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치고는 꽤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만화 <사랑과 거짓말>의 시마다 리리나나 소설 <도서관 전쟁>의 시바사키 아사코가 좋은 예가 아닐까? 리리나는 직설적인 성격 탓에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시바사키도 예쁜 여자로 사는 것의 고충을 이야기했다가 미움을 샀으니 말이다.

21권 복선, 에이펙스 레전드 패러디


내가 아카사카 아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만화를 그리는 데 있어 자기 스타일을 일관되게 밀어붙이면서도 오른쪽 온라인 게임 패러디의 예처럼 요즘 핫한 게임이나 심리 테스트 등에서 드립의 소재를 끊임없이 발굴해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이유는 왼쪽에 시노미야의 시로가네 집 방문에 대한 암시처럼 이전에 제시한 떡밥, 복선, 설정(캐릭터)를 요긴하게 써먹는다는 점인데, 그림체와 캐릭터만 좋으면 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는 러브코미디 만화 시장에서 아카사카 아카처럼 스토리로 승부하는 작가는 정말 드물다.


총평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카구야 님> 20권은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만화였다. 개그도, 스토리도, 작화도 기대 이상이었고, 트렌디한 소재와 야무진 복선 회수, 관계에 대한 번뜩이는 통찰이 잘 드러나 있어 만족스러웠다. 번역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독자가 모를 만한 사실을 역주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 21권도 정발되면 필히 구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