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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사회

<네티즌 언어>를 읽고 - 블로그에 대한 생각

Q. 블로그의 글들을 그 성격에 따라 콘텐츠(정보글)와 커뮤니케이션(잡담)으로 나눌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블로그는 관심사가 투영된 폐쇄적이고 사적인 공간일까, 또는 가상 이웃들과의 교류를 위한 열린 사교의 장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A. 이는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의 저서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논의한 '콘텐츠 지향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지향 미디어'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1인 미디어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블로그에는 그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다. 이는 블로그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정보나 오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저널리즘과 비슷하며, 커뮤니케이션과 콘텐츠의 성격을 모두 가지기 때문이다.

 

1인 미디어를 대표하는 미니 홈페이지나 블로그는 모두 사회적 관계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중략) 정보를 중심으로 인맥을 쌓는 블로그 역시 사회적 관계를 맺는 유용한 수단이다. 블로거(blogger)들이 올린 전문 정보나 속보는 포털의 검색으로 연계되어 어떤 미디어보다도 빠르게 확산, 전파되고 있다.

<네티즌 언어>, 76쪽, '온라인 커뮤니티'



'정준희의 해시태그'를 보고 - 블로깅과 저널리즘의 공통점



Q. 블로그에서의 소통은 일대일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만약 내 글에 여러 개의 댓글이 달리고, 그것들에 하나하나 답글을 달면 그것은 여러 사람과 동시에 소통하는 것과 같을까? 아니면 그것도 한 번에 한 명씩이니 일대일로 봐야 할까?

A. 개인적으로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카카오톡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내가 단톡방에 밥 먹자는 글을 올리고 세 사람이 내게 갠톡을 보냈다고 하자. 이때 세 명에게 각각 답장을 보내야 하므로 이는 일대일 소통이고,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댓글은 일종의 수다이다. 수다는 과제 지향적이지 않고 관계 지향적이다. 미니홈피나 블로그, 카페는 일종의 수다를 위한 만남의 장이다. 인터넷을 통한 관계는 실시간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접속하므로 '1:多'의 관계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나'와 '너'라는 '1:1'의 관계를 지향하는 만남이다.

같은 책, 65쪽, '댓글, 베플, 악플'



Q. 왜 댓글은 일상 회화와 달리 본론부터 말할까?

A.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익명성(이름, 나이, 성별, 외모 등의 정보가 없는 상태)이 유지되는 공간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블로거가 아니라 그 블로거가 쓴 글에 집중되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기와 글쓰기'가 결합된 네티즌의 의사소통 방식은 일상의 의사소통 방식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중략) 댓글은 다른 네티즌의 글에 대한 공감이나 반감을 표시하는 짧은 글로서, 관계 지향성이 높은 일상적인 '말하기'와 달리 과제 지향성이 매우 높다. 즉, 화제에 도달하기까지 의례적인 도입부가 거의 없거나 생략되기 일쑤이며, 쉽사리 화제를 바꾸는 일도 없다.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며 댓글을 다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댓글이) '글쓰기로써 말하기'가 아니라 즉흥적인 '말하기'에 가까운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같은 책, 62 - 63쪽, '글쓰기로써 말하기'


Q. 댓글을 통한 소통이 말로 하는 것보다 어려운 건 왜 그럴까? 특히 댓글로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 엉뚱한 지적이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A. 미국의 사회학자 앨버트 머레이비언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메시지 전달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7%, 목소리와 어조 등이 38%, 비언어적인 태도가 무려 55%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듯 말은 의미를 이루는 요소가 다양하지만, 글은 글자가 전부니 의미 전달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본인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모호하거나, 필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글은 평면적이고 말은 입체적이다. 왜냐하면 글은 활자가 전부이지만 말은 음성 외에도 소리의 길이나 높낮이, 얼굴 표정, 몸짓, 옷차림 등이 의미를 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같은 책, 69쪽, '입체적인 커뮤니케이션'

 

얼굴을 맞대지 않은 상태에서 모니터와 활자를 이용하여 의사소통하는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에 비해 비교적 감정 전달이 쉽지 않다.

같은 책, 71쪽, '이모티콘'

 

사실, 많은 경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주장은 단지 자신이 그리는 것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 때, 혹은 자신의 만화가 인기가 없을 때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작가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뿐이다. 혹은 스스로 자신이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Q. 친구들과의 수다와 인터넷 서핑은 정보 습득이라는 실용적 측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

A. 잡다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그 과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정보의 홍수'라는 말처럼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폭은 매우 방대하다는 점이 다르다.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실시간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해지는 아주 자질구레한 소식들을 접한다, 심지어는 전날 방송된 드라마나 쇼프로(오덕이면 이번 분기 애니 감상평, 좋아하는 라노벨 작가의 신작 단편 소식 등)에 대한 리뷰까지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끔 엉뚱한 이야기가 올라오기도 한다. '인터넷'이 없다면 알 수 없는 과잉의 정보이다. 오직 친구들과 나누는 '수다'를 통해 알 수 있는 일을 인터넷 매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은 수다를 떠는 친구의 기능을 할 뿐이다.

76쪽, '온라인 커뮤니티'

 

Q.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의 교류도 사회성의 척도로 볼 수 있을까?

A. 그건 무리다. 단순히 친목질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성이 좋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식의 사교성은 친족이나 지역공동체 같은 현실적인 필요가 아니라 특정한 정보에 대한 관심만으로 지탱'되며,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전개된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흉내일 뿐이며 언제든지 물러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현실 속의 만남보다 가상공간의 만남을 즐긴다. 즉, 타인과의 만남보다 다양한 커뮤니티를 통한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에 더 능동적이다. 개인의 미니홈피나 블로그 그리고 카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알리는 노력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화되고 있다.

<네티즌 언어>, 11쪽, '네티즌의 속성'

 

그럼 도대체 한국의 오타쿠란 무엇인가? 사회성이 부족한 존재인가? 사회성 부족은 다중적으로 분화되어 인터넷 공간에서 커뮤니티 기반으로 활동해온 지금 세대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사회성 부족이 아니라 구조 맹신으로 불러야 옳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사람들이 단순히 커뮤니티를 이름을 정체성으로 삼길 거부하고 '~적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자신을 이루는 '작은 구조'가 세계라는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융희, '서브컬쳐 비평/연구의 함정 - '오타쿠'라는 허상의 유혹'

 


참고 : 오타쿠의 사교성에 대한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 (굵은 글씨는 블로그나 카페, SNS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

 

오타쿠들은 현실보다 허구에 강한 리얼리티를 느끼며 그 커뮤니케이션도 대부분 정보교환에 치중해 있다. 바꿔 말하면 그들의 사교성은 친족이나 지역공동체 같은 현실적인 필요가 아니라 특정한 정보에 대한 관심만으로 지탱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에게 유익한 정보가 입수되는 한에서는 충분히 사교성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그 커뮤니케이션에서 거리를 둘 자유 또한 항상 유보하고 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161쪽

 

현실의 필연성은 타자와의 사교성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이 새로운 사교성은 현실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자발성에만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아무리 경쟁이나 질투, 비방이나 중상과 같은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전개된다고 해도 그것들은 본질적으로는 흉내일 뿐이며 언제나 퇴장한다는 선택지가 준비되어 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161 - 162쪽,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