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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사회

'PC방 전원차단 실험'이 남긴 교훈

 

예전에 다른 블로그에 '9년 전 PC방 전원차단 실험을 한 기자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분께서 따끔한 지적을 해주셨고, 사건에 대한 나의 입장이 정리된 뒤 제대로 이 주제를 다뤄보고 싶어 글을 서로이웃 공개로 전환했다. 그때 내가 올린 글은 아래와 같다.

 

 

기자 본인도 젊은 혈기에 저지른 실수라고 시인했으니, 이제 조롱, 비난조의 댓글은 그만 달리면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도 충동적으로 블로그에 올린 글을 다시 보면 창피할 때가 있는데, 그래도 이 분은 자기 흑역사를 얼버무리지도 않으시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제3자일 뿐이니 기자의 됨됨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도 그 분에 대한 악성 댓글이 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딱히 기자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보도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해당 사건의 핵심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아래 영상을 보면서 이 사건이 어떻게 회자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 이 영상은 꽤나 편파적이고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문제다.

 

3:51 '끝까지 그는 자신의 실험은 틀리지 않았으며 게임이 폭력성을 불러 일으킨다고 확신하며 주장했고'

이 영상이 6월 23일자인데, 3일 전에 경향신문과 유 기자의 통화 내용이 실린 기사가 나왔다. 그 기사는 그가 “당시 경솔했고, 잘못된 보도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고, '당연히 논리가 성립되지 않은 실험이었죠'라고 덧붙였다고 적고 있다. 이 영상을 업로드하기 3일 전에 올라온 기사를 놓친 것이라면 유감이다.

4:05 '결국 서울대 교수의 권위와 이름을 팔아 자신이 행한 비인륜적인 전원차단 실험을 정당화하기에 이릅니다'

'유 기자는 실험 아이디어는 곽 교수가 줬지만, 그걸로 실험을 한 것은 자신이기 때문에 결국 잘못은 전적으로 자신 탓이라고 여러차례 강조했다'고 기사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5:00 '억울함을 내비쳤습니다'

5:10 '그동안 곽 교수님이 얼마나 억울했고 얼마나 큰 마음 고생을 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에서 곽 교수는 '기자들에게 섭섭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기자에게 설명했고 기자는 골라서 썼고, 틀린 말이 나간 게 아니니까 그러려니 해요. 실컷 기자에게 설명했는데 신문에 안 나갔다고, 때론 말한 것과 다르게 나갔다고 불평하는 교수도 있어요. 쉽게 잘 설명해주면 될 텐데'라고 대답했다.

또 억지 실험 때문에 욕을 먹은 것을 알고 있냐는 질문에는 '욕하는 e메일도 많이 왔는데,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다 설명해줬어요. 나중에 KBS 개그콘서트에서 PC방 실험을 패러디하자 동료 교수가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내가 딱 한마디 했죠. "나 흉내 낸 여자 예뻐요?" 그랬더니 그 교수가 걱정 안 해도 되겠다며 돌아갔어요'라고 대답했다.

이렇듯 위 영상을 제작한 유튜버는 문제의 보도에 관여한 기자와 교수를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교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주장을 감성적으로 포장하고, 둘 중 어느 쪽의 입장 표명도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 그에게 기자를 욕할 자격이 있을까?

 

 

[기자수첩] 밈으로 띄우려다 비난 쏟아져, 본질은 ‘과장 부실보도’ MBC 책임도 작지 않아

유충환 기자 입장에선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사안의 본질을 놓치고 있어서다. 당사자 동의 없이 PC방 전원을 내린 실험 자체는 문제의 일부다. 이후 학생들이 보인 격한 반응이라는 부실한 근거를 토대로 ‘게임의 폭력성’이라는 정해진 답에 껴 맞추려 한 부실한 보도, 과장보도가 핵심적인 문제다. 티저영상이나 사과영상 모두 보도가 갖는 논리적 결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무리수 실험’이라는 데만 초점을 맞추니 비판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부실보도, 과장보도라고 생각했다면 이를 소재로 희화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충환 기자만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 모든 게 유충환 기자 개인의 책임은 아니다. MBC의 방송뉴스와 유튜브 영상은 기자 개인의 콘텐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2011년 당시 유충환 기자의 부실한 발제를 통과시킨 건 MBC다. 이번에도 문제 많은 티저 영상 제작을 기획하고 용인한 건 MBC다. 더구나 2011년 PC방 전원차단 리포트는 인터넷 콘텐츠가 아닌 정식 방송 뉴스였다. 실험 자체의 문제와 더불어 당시 리포트가 가진 논리적 문제를 MBC가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그렇다면 기자 개인의 유튜브 입장표명이 아니라 방송을 통해 정정보도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닐까.

미디어 오늘 'MBC PC방 전원차단 보도 ‘레전드 사건’ 희화화 잘못됐다'

 

 

나는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의 본질은 실험이 아니라, 기자가 그런 억지 실험을 하게 만든 언론사들의 잘못된 보도 관행에 있다고 본다. 비록 사람들의 기억에는 PC방 실험이 준 충격만 남아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밈으로 소비하고 기자를 조롱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이 사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고, 그렇게 된 책임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9년 만에 MBC의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에서 해당 사건을 언급한 기자는 비난 세례를 받고 유튜브에서 제명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채널에 업로드되는 자극적인 영상들과 그것들을 흥미 본위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의 모습은 상당히 걱정스럽다.

마지막으로 이웃 분의 지적에 대한 나의 답변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하지만 실험과 그 실험을 한 기자 개인, 그리고 문제의 사과 영상에 대한 비판에만 몰두하느라 아무도 이 사단이 난 근본적인 원인을 묻지 않는 게 아쉬웠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기사의 결론을 정해두고 인터뷰를 입맛대로 골라 쓴 뒤 PC방 실험을 급조해서 갖다 붙인 기자와, 이런 억지를 공식 뉴스에 내보낸 방송사에 있는데 말이지요. 그 기자는 결국 유튜브에서 빠졌지만, 언론의 과장, 허위 보도 관행이 남아있는 한 제2, 제3의 PC방 기사는 반드시 나올 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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