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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반도서

아픈 것아, 아픈 것아, 날아가라 - 리셋 증후군


미아키 스가루는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한 작가다. 사실상 데뷔작이나 마찬가지인 '스타팅 오버'를 비롯하여 출판된 소설만 7권이지만, 신작 '너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플롯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자가복제라는 말도 들린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처음 읽을 때는 감동적이지만 내용이 뻔해서 금방 질린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내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3일간의 행복'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그날로 미아키 스가루에 입문한 사람으로서 이 책은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사건의 개연성과 인물의 행위 동기, 초반의 몰입감은 오히려 전작보다 퇴보한 느낌이라, 미아키 스가루의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먼저 사건의 개연성과 행위 동기를 보자. 1장에서 주인공은 직선 2차선 도로에서 졸음 운전을 하다 눈앞의 소녀를 보고 급하게 차를 세운다. 서둘러 차에서 내린 주인공은 차의 범퍼가 멀쩡하고 길가에 시신도 보이지 않아 안심하지만, 아까 본 소녀가 말을 걸어와 방금 전의 교통사고로 자신이 죽었고, 모종의 능력으로 열흘의 유예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주인공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전화번호를 알려준 뒤 헤어진다. 여기서 생각나는 의문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각각 알아보겠다.

첫 번째, 소녀는 왜 한밤중에 2차선 도로 위에 있었을까? 주인공이 소녀에게 이러한 당연한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는 화를 냈고, 결국 주인공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한다. 그녀가 참다못해 가출한 것은 주인공을 만난 뒤이니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두 번째, 주인공은 왜 소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차에 치인 사람이 멀쩡히 걸어다니면 보통 내상이 있다고 보고 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게 하지, 그 사람에게 사고를 없던 일로 만드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작중에서 주인공은 소녀의 팔에 없던 화상 자국이 생긴 일을 근거로 그녀의 말을 믿어준다. 하지만 이는 그녀가 못 본 사이에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면 몰라도, 능력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세 번째, 소녀는 왜 주인공을 원망할까? 작중에서 라디오 진행자가 '살아있어서 행복해요'라는 주제로 사연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듣기 싫다는 듯이 소녀가 볼륨을 줄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아버지의 학대에 지쳐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면, 자신을 죽게 만든 주인공에게 고마워하지는 않더라도 그를 미워하는 것은 이상하다. '푸른하늘 흐린하늘'의 여주인공처럼, 죽기 전에 꼭 하고픈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주인공에게 속죄를 강요해야만 속이 시원했을까? 남주가 여주에게 휘둘리는 것 자체는 좋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던 것 같다.

네 번째, 주인공은 왜 소녀에게 미안해하는 것일까? 그녀가 주인공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면 모를까, 열흘 뒤에 죽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녀가 내린 결정이다. 주인공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은 결국 죽는다. 백 일 뒤, 10년 뒤, 50년 뒤 등 남은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유한한 시간을 산다. 정확히 열흘 뒤 그녀가 죽는다고 그것이 주인공의 잘못은 아니며,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주인공 탓에 요절했다고 할 수도 없다.

다음으로 초반의 몰입감을 보면, 전작과 큰 차이 없는 줄거리와 캐릭터가 신경 쓰여 몰입하기 어려웠다. 자의식이 강해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취미생활로 시간을 때우는 남자와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여자,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 주인공 등. 나는 이 책이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는데, 작가가 특정 소재나 표현에 매몰되어 정작 이야기의 완성도나 재미는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자가 '죽음을 앞두고 피어나는 미의식'을 추구한다면 후자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 말 하나 쓰려고 소설을 쓴 사례인데, 필력이 정말 뛰어난 작가가 아니고서야 이야기가 소재에 묻히는 법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혹평을 하기는 했지만, 주인공에게 리셋 증후군이 있는 것 같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픈 것아, 아픈 것아, 날아가라>는 꽤 잘 쓴 소설이다. 소재나 전개 방식이 취향을 타기는 해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이니,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