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일반도서

호모 데우스 - 인본주의로 본 인류의 역사와 미래

 

유발 하라리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인류의 역사를 다룬 책 <사피엔스>로 유명세를 얻은 그는 <호모 데우스>로 돌아왔는데, 일각에서는 둘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물론 두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일부 겹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이자 <호모 데우스>가 전작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인본주의’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본주의’는 삶의 의미가 우리 모두의 고유한 경험에서 나온다는 믿음인데, 이 개념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우선 종교를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책에서 종교를 ‘인간의 사회 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하면서, 종교는 개인의 진리 추구를 의미하는 영성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세상이 신이나 정령과 같은 초인적 존재에 의해 돌아가며, 역병이나 지진과 같은 불행한 일들은 그들이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해왔다. 요즘은 이러한 생각이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폄하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러한 초인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협력하며, 자신이 더 큰 계획(또는 흐름)의 일부라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가 인류에게 준 것은 의미이지, 힘이 아니었다. 지난 수천 년간 인류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기아, 역병, 전쟁이었는데, 종교는 이것들이 신의 뜻이라고 사람들을 위로할 수는 있어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 혁명을 기점으로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했고, 천벌인 줄 알았던 전염병과 자연재해 또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이후 과학은 마침내 기아, 역병, 전쟁을 인류의 난제에서 통제할 수 있는 사안으로 격하했고, 힘을 손에 넣은 인류는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과학은 객관적 사실만을 다루기에 종교처럼 윤리적 딜레마에 답할 수 없었고, 인류는 그럴 때 필요한 실질적 지침을 얻기 위해 과학이 주는 객관적 사실과 종교가 주는 윤리적 규범을 모두 필요로 했다. 정리하면 근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인류에게 힘의 대가로 의미를 요구했고, 이때 등장한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가 의미를 되찾아준 덕분에 인류는 구원받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인본주의를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앞의 두 분파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자유주의의 로크, 루소, 밀과 사회주의의 마르크스와 레닌을 언급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14년(제1차 세계대전 시작)부터 1989년(베를린 장벽 붕괴)까지는 인본주의의 세 분파가 격돌한 시기였으며, 마침내 자유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에 지금 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부연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은 자유주의(서유럽, 미국 등)와 사회주의(소련 등), 그리고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인 파시즘(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지지하는 국가들 간의 무력 충돌이었고, 종전 이후 사회주의가 부상하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인간의 경험이 의미와 권위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인본주의는 정치, 경제, 미학, 윤리,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우리의 생활을 바꿔 놓았다. 각각의 예를 들면,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는 ‘유권자는 항상 옳다’와 ‘고객은 항상 옳다’는 구호를 내세워 1인 1표의 원칙이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십계명처럼 신성시한다. 다른 분야도 이와 비슷한데, 인본주의 미학은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렸다’고, 인본주의 윤리학은 ‘마음의 소리를 따르라’고, 인본주의 교육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옳고 그름의 문제를 관장하는 윤리적 규범을 인본주의는 거뜬히 제시해냈고, 과학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섣불리 인본주의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데, 이는 인본주의가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이 전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조건이라 함은, 첫째로 인간의 경험은 모두 평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 둘째로 사람의 욕구와 필요는 자아에 매여 있으며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것, 마지막으로 사람이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의 조건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현대 과학인데, 생명공학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업그레이드하여 호모 사피엔스와는 전적으로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초인류의 탄생을 앞당기고 있으며, 뇌과학은 우리의 욕구가 신경 속을 흐르는 전기 신호일 뿐이며 뇌파 측정을 통해 사람의 의사결정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생물학은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의 욕구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기까지 했다.

저자는 현재 인본주의를 대체할 마땅한 대안이 없지만,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교가 유력한 후보라고 덧붙인다. 인간이 생화학적 하부구조로 분해 가능한, 자유의지가 없는 단순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이 둘은 인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먼저 기술 인본주의의 목표는 인간의 마음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지만, 과학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기술 인본주의는 자칫 위험한 시도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음으로 데이터교는 데이터 처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데이터가 자유롭게 흐르는 것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데이터교의 입장에서 볼 때 한 명의 인간은 성능이 떨어지는 연산 장치이며, 감정은 시대에 뒤쳐진 알고리즘이다. 따라서 데이터교가 득세한다면 인간이라는 종은 데이터의 방대한 흐름 속으로 편입되어 버릴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는 저자의 통찰력과 스토리텔링 능력, 그리고 세상을 보는 폭넓은 시야가 돋보이는 책이었다. 16세기의 종교혁명부터 20세기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에 이르는 근현대사를 인본주의가 득세하게 된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매력적이었고,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현대의 정치와 경제, 미학과 윤리, 그리고 교육의 바탕에 인본주의가 있다는 이론도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중간중간 등장하는 성경과 동성애에 관한 서술은 책의 핵심 주제와는 거리가 멀뿐더러 논조가 편향된 것 같다고 느꼈고, 저자가 인공지능, 특히 기계학습과 전문가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AI가 직업 시장에 가져올 변화를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를 파헤치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인문학자의 특권이지만, 그 제안의 근간에 있는 과학적, 기술적 지식이 얄팍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