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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라이트노벨

세습 정치인 - 라이트노벨로 알아보는 일본 문화

 

라이트노벨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에는 아버지가 현 의회 의원인, 유키노시타 유키노라는 여자아이가 나온다. (일본의 행정 구역 중 '현'은 한국의 '도'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도쿄도를 포함한 사이타마, 지바, 가나가와 현은 일본 총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수도권으로, 지바 현의 의원이란 직함은 한국의 경기도 의회 의원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벌써부터 아버지의 기반을 물려받아 선거에 입후보하고 싶어 한다. 한국에는 세습 정치인이 없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지만, 작중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일본의 지바현을 무대로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 유키노시타 하루노는 유키노시타 유키노의 언니로, 행사를 주최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참석한 상황임.

이곳 유료 구역은 광장 안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다. 게다가 불꽃을 쏘아올리는 곳 정면이라 나무들에 방해받지 않고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원래는 티켓을 구입해야 입장 가능한 구역이지만 하루노의 연줄로 그냥 들어올 수 있었다.

(중략)

"후아, 진짜 상류층이구나......"

유이가하마가 감탄과 어이없음의 경계선을 오가는 미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하루노가 후훗 웃었다.

"뭐 그런 셈이지. 알지? 우리 아빠 직업. 이런 자치 단체 이벤트에는 강하거든."

"현 의회 의원이면 시에도 영향력이 있나 보죠?"

"오옷, 눈치가 빠른걸? 역시 히키가야다워. 사실 이건 현 의회보단 회사 때문이지만. "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건설업 쪽일 거다. 공공사업 분야에도 참여한다면 당연히 파워가 막강하겠지. 예로부터 선거란 세 가지 '판', 이른바 발판, 간판, 주판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러한 요소들이 고루 갖춰진 셈이랄까.

책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5》 191-192쪽

 


그렇다면 세습 정치인이란 무엇이고, 왜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러한 풍경이 일본에서는 흔한 것일까? 그 답은 아래 기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세습 국회의원 한국5배...日에는 왜 정치금수저가 많을까

위 기사에 따르면, 각국의 국회에서 세습 의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이(20대 국회) 5%, 일본이(48회 선거 이후) 중의원 기준 26%, 미국이(2015년 기준, 상.하원 평균) 6%, 영국이(2009년 하원 기준) 3%였다고 한다. 연도가 제각각이라 신빙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일본의 비율이 저렇게 높게 나온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러면 대체 일본에서 권력의 대물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탄생한 세습 정치인에는 누가 있을까?

 

어느 나라에나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은 2세 정치인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본은 특정 가문이 지역구를 세습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구성원들의 행태와 지역에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과거의 다이묘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이런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은 상류층, 귀족 가문들만이 다니는 일관제 사립학교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닌다. 그리고 명문대 입학과 해외 유학을 거쳐서 고시를 통과해서 관료가 되거나 특채로 대기업에 들어가서 사회 생활을 한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후계자로 낙점된 사람은 자신과 유사한 상류층 가문과 결혼을 한 뒤 현역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비서로 몇 년 일하다가, 아버지가 선거 직전에 은퇴 선언을 하면 곧바로 후원회(後援会) 조직을 물려받아서 당선된다. 만일 정치인에게 아들이 없다면,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거나 아니면 조카나 데릴사위, 외가 쪽 식구에게 물려준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비서 등 심복 측근에게 물려준다.

이런 지역구 세습은 일본에서 꽤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대신, 아베 신조, 아소 다로 역시 부친에게 지역구를 세습받은 세습 정치인이다. 2018년 기준으로 중의원 전체의 약 23.4%가 세습 의원이며, 집권 자민당으로 범위를 좁히면 1/3 수준이다. 내각에 한정지어서 보면 일단 아베 신조 전 총리부터 3대 세습이고 대신들의 절반이 세습 의원이다. 일본에서는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세습직이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고, 이 때문에 자민당에서도 '세습 금지법' 등의 논의가 있었으나 전부 무위에 그쳤다. 이런 식으로 정치가 이뤄지니 새로운 피가 수혈되기 어렵고, 권력의 대물림이라는 점에서 반민주적이라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보통 정치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3반(三バン)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3반이란 부모의 연줄 기반, 학력과 외모 등의 간판, 정치자금을 모아둘 돈가방이라는 뜻이다.

나무위키 '일본 정치의 특징과 문제점 - 지역구 세습'

 

유키노시타의 아버지는, 가문의 당주인 아내의 결정을 실행하는 일종의 대리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일본에 세습 정치인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고, 한국은 과연 어떨까? 또 앞으로도 일본에서는 세습 정치인이 우세일까?

 

일본 정계에 세습 문화가 남아있는 이유로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 장인 정신과 잇쇼켄메이 정신, 지방 자치 제도, 토착 유지가 존중받는 사회 문화, 그리고 돈과 조직을 움켜쥔 후원회 문화를 들 수 있다. 일본 정치는 정당 대신 코엔카이(後援会)라고 불리는 후원회가 선거를 주도하는 구조이다. 후원회는 지역구의 유력자들, 향토 기업, 이익 단체들을 관리하면서 자금을 모으고, 그 대가로 다양한 이권을 배분하며, 선거에서는 이들을 조직표로 동원한다. 즉 일본 정치는 후원회의 지원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선거에서 당락을 좌우하는 요소로 세 가지를 말하는데, 인지도, 조직표, 정치자금이 그것이다. 하지만 세습 정치인들은 "OO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홍보하면 쉽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고, 조직과 자금은 후원회를 물려받으면 해결된다. 심지어 후원회의 정치자금은 비과세 상속이 가능하다. 이렇다 보니 정치 신인들은 설사 거대 정당의 공천을 받더라도 세습 정치인을 이기기 힘들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20대 총선 253개 지역구 중에 가문의 선대(아버지, 할아버지 등)가 국회의원을 지냈던 곳에서 당선된 사례는 고작 5명에 불과하며 이들 중에 일본처럼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곧바로 자식한테 지역구를 물려주는 형태로 승계한 사례는 없다. 모두 아버지가 사망 혹은 낙선으로 정치를 떠난 뒤 다른 정치인들이 몇 번 하다가 전임자의 자식이 당선된 경우라 일본과는 양상이 다르다.


최근에는 일본 사회 역시 현대화되면서 이런 세습 문화가 사라져 가는 상황이다. 전체 의원 중 50%에 달했던 세습 비율이 최근에는 25% 이하로 내려갔으며, 2005년 기준 51%에 달했던 자민당의 세습 비율도 현재는 의원 중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일본의 야당은 우파, 좌파 모두 정치적 격변이 심해 세습 의원이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기도 하다.

나무위키 '일본 정치의 특징과 문제점 - 지역구 세습'


미국에는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처럼 부자가 나란히 대통령이 된 사례가 있고, 한국에도 박정희와 박근혜 부녀가 대통령을 지낸 바 있다. 위 기사의 결론처럼 세습 정치인이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은 좋지 않지만, 민주 시민으로서 권력의 대물림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