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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경제

애니화로 떡상한 만화들 - 재고 속 업계의 사정

'귀멸의 칼날'만큼 애니 덕을 많이 본 만화는 없습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서점에서 즐겨 보는 시리즈의 신간을 산 적이 한 번쯤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산 만화의 재고가 몇 권이나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어떤 상품이라도 마찬가지지만, 서점의 도서들도 인기와 발매 시기, 업계의 사정에 따라 재고의 권수가 정해집니다.

하지만 인기나 발매 시기처럼 알기 쉬운 조건과는 달리, '업계의 사정'이란 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해당 시리즈의 누적 판매량이나 인지도 등 일반적인 지표와는 무관하게, 서점이나 출판사, 직원 개인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매장에 들여오고 내보내는 재고의 양이 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통기한 지난 아이스크림은 악성 재고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업계의 사정이라는 것은 나쁜 것일까요? '어른의 사정'이라는 말에 담긴 부정적인 뉘앙스로 인해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아닙니다. 편의점이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을 한가득 사두는 것도, 여름 끝자락에 아이스크림을 떨이로 파는 것도 엄연히 매장의 사정이지만, 이를 안 좋게 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업계 관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위 사례처럼 상식적인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익숙한 예를 들자면 잘 나오던 만화가 애니화되면서 가격이 확 뛰거나, 애니 종영 후 정발이 끊기거나, 2기가 나온 후에야 정발이 재개되는 등 팬으로서 화가 날 만한 일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독자들도 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댓글로 항의를 하거나 원서를 일본에서 직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도 많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소통과 상생입니다.


그럼 잘 팔리는 상품에 집중해 매출을 키우고 싶은 출판사와, 즐겨 보던 만화가 끝까지 나오길 바라는 독자의 입장은 영영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번 넷마블 트럭시위 사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게임사와 게이머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처럼, 출판사와 서점은 독자를 필요로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출판사와 서점은 독자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을 소중한 고객으로 대우해야 하지만, 독자들도 도서 시장의 현주소에 관심을 갖고, 이러한 관행이 생긴 이유를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ㄱ' 문고 강남점의 신간 만화를 재고 권수에 따라 분류하고, 재고가 많거나 적은 이유에 대한 추측을 적어 봤으니 참고해 주세요.

* 'ㄱ' 문고의 만화 재고는 가장 적을 때가 2권이며, 인기에 따라 5권, 10권, 20권 순으로 늘어납니다. 여기서 재고 10권인 책이 5권인 책보다 두 배로 잘 팔리는 것은 아닌데, 이는 서점이 외상으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발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탁판매'라고 하며, 자세한 건 아래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위탁판매가 뭐길래… 서점 망할 때마다 출판사 휘청인다

“완전 전쟁통이야. 온 가족 다 동원해서 책 빼러 다니고 있어요.” 지난 17일 오전 11시 최종 부도를 맞은 대형서점 반디앤루니스의 여의도신영증권점. ‘영업종료’라고 써 붙인 출입금지 라인

segye.com



20권 이상


도쿄 리벤져스 (여성 독자에게 인기)


10권


이세계 미소녀 수육 아저씨 (애니 1기 방영 중)

비질랜티 (히로아카 외전)

장송의 프리렌 (인기 판타지 만화)


괴롭히지 말아요, 나가토로 양. (로맨스 19위)

고깔모자 아틀리에 (유명 판타지 만화, 여성향)

와카코와 술 (드라마 부문 1위)


5권


이누야샤 (초인기작)

이 힐러 귀찮아 (애니 1기 방영 예정)

위국일기 (유명한 순정만화)


섀도 하우스 (애니 2기 방영 예정)

녹풍당의 사계절 (드라마 부문 1위)

카나카나 (오늘부터 우리는 작가 신작, 애장판도 나올 만큼 인기였음)


짓궂은 안죠 양 (남성향 럽코, 내부 분류로는 바닥 서가에 진열되는 로맨스 만화)

페르소나 5 메멘토스 미션 (원작 게임의 팬을 위한 만화, SF/판타지 만화 주간 판매량 200위에도 들지 못했으며 리디 별점도 적음 - 설명이 되지 않는 재고)

샹피뇽의 마녀 ('퍼니퍼니 학원 앨리스' 작가 신작, 과거 혐한 논란 있었음)

급한 대로 동거하지 않을래요? (작가의 국내 첫 정발, 매우 낮은 인지도, 로맨스 만화 주간 판매량 172위 - 설명이 안 되는 재고)


2권


첫사랑 좀비 (예전만 못한 인기, 실제로 로맨스 만화 주간 판매량 172위)

첫사랑의 세계 (40대 독신 여성의 로맨스 만화)

신의 물방울 와이드판 (중년 독자를 위한 특별판)



이세계는 스마트폰과 함께, 이세계 전생 모험가, 나이츠 & 매직 (라노벨 원작)

이노센트 데빌 (인지도가 낮은 범죄 스릴러물)

연금 무뢰한 (인지도가 매우 낮은 판타지 만화)


노부나가의 셰프 (꽤 유명한 타임슬립 요리물, 지난 권에 임진왜란 떡밥이 나오긴 했지만, 혐한 논란을 빚은 작가의 신간도 5권이나 있음 - 설명이 안 되는 재고)


1권



프리티 보이,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뺏을 수 없어.

(로맨스 만화는 원래 잘 안 팔리는 상품이라서 'ㄱ' 문고에서도 바닥 쪽의 서가에 진열합니다. <프리티 보이>는 발매 2주만에, <그녀가>는 발매 1달도 안 되어 신간 매대에서 내려갔는데, 그 원인은 저조한 판매량과 출판사의 방치로 보입니다.)


* 도서가 신간 매대에 있는 기간은 달라질 수 있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화라고 전부 신간 매대에 진열되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진에 적힌 발매일과 도서 위치에 주목해 주세요.


* 도서가 신간 매대에 얼마나 오래 있을지, 평대와 서가 중 어디에 진열될 지는 출판사와 서점의 계약 조건에 따라 정해집니다.

서점에 누워있는 책 VS 서 있는 책 차이점은?  

왜 어떤 책은 서 있고, 어떤 책은 누워있을까요? 서점에 들어가면 어떤 책은 평대에 누워있는 반면, 어떤 책은 서가에 꽂혀있습니다. 소비자는 당연히 누워있는 책들에 더 눈이 가기 마련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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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재고 권수를 정하는 일차적인 기준은 과거 매출과 인지도 등의 지표지만, 업계 사정도 영향을 줍니다.


'이 힐러'처럼 두 권씩 깔리던 만화가 애니화 이후 다섯 권씩 들어오고, '이세계 아저씨'처럼 제목도, 작가도 생소한 만화가 열 권씩이나 들어오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특히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가의 만화는 과거 매출 데이터가 없으므로 원작의 흥행, 애니화 여부 등의 변수를 감안하며, 기존 작가의 신작이라면 완결된 시리즈의 과거 매출과 인지도 등 일반적인 지표도 고려합니다.


비질랜티와 섀도 하우스는 둘 다 판매량이 낮지만 각각 원작과 애니 덕분인 것으로 보이며, 샹피뇽의 마녀와 카나카나는 전작의 성공이 컸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