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과 VGA - 판타지 애니 속 2010년대의 유산

들어가며

2013년에 방영한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아웃브레이크 컴퍼니>는 히키코모리였던 주인공 카노 신이치가 일본 정부에서 운영하는 상사 '어뮤텍'에 입사해 이세계의 '엘던트'라는 제국에 오타쿠 문화를 전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 글에서는 내가 이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궁금증과 그것을 해결한 과정에 대해서만 적어보겠다.

1. 왜 HDMI 연결이 주류가 된 2010년대 애니에 VGA 케이블이 나왔을까?

위 사진은 엘던트 제국이 일본 정부와 국교를 단절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선 신이치가 어뮤텍 사장과 영상 통화를 하는 장면인데, 왼쪽의 모니터를 잘 보면 아래에 파란 VGA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다. (VGA란 컴퓨터가 모니터 화면에 영상을 출력하게 하는 기술인데, 현재는 VGA의 상위 호환인 HDMI가 주로 쓰인다. 맨 밑의 표에 둘의 차이를 정리해 두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왜 이미 HDMI가 주류가 된 2010년대 애니에 VGA 케이블이 나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웃브레이크 컴퍼니>가 방영된 때인 2013년은 많은 신형 노트북들이 HDMI만 지원할 정도로 HDMI가 대중화된 시기였다.

하지만 보급형, 사무용 PC 시장에서는 VGA의 저렴한 가격과 VGA 연결을 지원하는 수많은 주변기기 덕에 HDMI가 정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사무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일이 많은 출장 영업사원들에게 주변기기와 상성이 좋은 VGA는 매력적이었다.

즉, 공기업으로서 이세계에 영업사원을 파견하는 어뮤텍 상사에서 HDMI 대신 VGA 케이블을 쓰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2010년대에는 이미 HDMI가 주류였지만 VGA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애초에 VGA는 왜 HDMI로 대체된 것일까?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복잡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아래 사진을 보자.

2. VGA가 HDMI로 대체된 이유와 시기는 어떻게 되는가?

학교 다닐 때 이렇게 생긴 TV를 본 적 있는가?

이것은 작중에 여러 번 등장하는 일본제 브라운관(CRT) TV의 사진으로, 앞서 본 사진의 모니터와 마찬가지로 두 가닥의 선이 연결되어 있다. 왜 선이 두 개나 필요할까? 그것은 VGA 케이블이 영상 표현에 특화되어 음성 송출을 지원하지 않고, 따라서 별도의 케이블로 음성 신호를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즉 VGA는 HDMI와는 달리 하나의 케이블로 영상과 소리를 같이 송출할 수 없었고, 이것이 VGA가 HDMI로 대체된 첫 번째 이유이다.

자세히 보면 웹캠을 제외하고 두 가닥의 선이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 이유는 PC 디스플레이 시장의 트렌드가 CRT에서 LCD로 바뀐 것인데, 앞서 본 사진의 브라운관 TV가 CRT였다면 위 사진의 모니터는 LCD이다. (CRT와 LCD는 모니터를 작동하게 하는 기술로, 현재는 CRT의 상위 호환인 LCD가 주로 쓰인다. 밑의 표에 둘의 차이를 정리해 두었다.)

CRT와 LCD는 무게, 발열, 해상도, 수명 등 많은 부분에서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CRT는 LCD와 달리 HDMI 연결을 지원하지 않으며 요즘 나오는 LCD 모니터 역시 VGA 연결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C 디스플레이 시장의 유행이 CRT에서 LCD로 바뀐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에 VGA에서 HDMI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은 이 때문이다.

앞뒤가 납작한 LCD 모니터

앞뒤가 볼록한 CRT 모니터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LCD는 CRT의 상위 호환이며, PC 디스플레이 시장의 트렌드도 LCD로 이동했고, 심지어 CRT는 HDMI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왜 주인공의 회사는 위 사진처럼 모니터는 LCD로 구비해 놓고 TV는 여전히 브라운관을 쓰는 것일까?

3. 어뮤텍은 왜 여전히 브라운관 TV를 쓰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LCD TV로 바꾸려면 돈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2010년대만 해도 브라운관보다 저렴한 가격에 새 LCD TV를 장만할 수 있었지만, 공기업에서 TV 하나 LCD로 바꾸자고 멀쩡한 브라운관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치며

이렇게 2010년대의 판타지 애니인 <아웃브레이크 컴퍼니>의 디테일에 대해 알아보았다. 나는 고등학교 때 멀티미디어 당번을 맡은 적이 있어 선생님들이 쓰는 노트북, 교실의 TV,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케이블에 관심이 많았는데, 졸업 이후로는 단 한 번도 VGA 케이블이나 CRT 모니터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학교, 군대, 직장 등에서 겪었던 VGA나 CRT에 얽힌 경험을 댓글로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

VGA 케이블	HDMI 케이블
1980년대	2000년대
IBM 개발	HDMI 재단 개발
아날로그	디지털
소리 X	소리 O

CRT 모니터	LCD 모니터
1960년대	1980년대
모토롤라 개발	앱손 개발
전자총 방식	액정 방식
때리면 잘 보인다	때리면 고장난다

참고자료

[인터넷 자료]

VGA ports bowing out of home computers, lingering in the workplace

What year did HDMI ports start to come standard on off-the-shelf desktop computers?

How long has it been since VGA ports were standard on laptops? When did HDMI become common?

[보고서]

Technical Analysis - CRT 기술의 동향과 전망

[신문 칼럼]

'TV의 진화와 진실', 이근형, 디지털타임스, 2009. 11. 12